수메르인은 비옥한 초승달 지대인 동부 산맥 지대에 살다가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으로 이주해 들어온 민족이었습니다.
그들은 원래 거주지에 있을 때부터 어느 정도 문명 단계에 들어서 있었으며, 그들이 이주해 들어왔던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 역시 완전히 미개한 지역은 아니었습니다.
거기에는 금속과 돌을 함께 사용하는 문명이 알루바이드, 우르크 등과 같은 지역을 중심으로 이미 상당한 정도로 발달해 있었습니다. 여기에 수메르인이 출현한 것은 기원전 3500년경이었습니다.
수메르인은 당시에 벌써 문자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자가 문명의 발전에 깊은 영향을 주어 일대 혁신을 일으키기까지는 수백 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문자의 처음 형태는 이들이 이주할 무렵에 나타났던 상형문자였습니다. 이 문자는 쓰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을 뿐 아니라 표현할 수 있는 대상도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잠자다'라는 표현을 위해서는 다소 시간은 걸리더라도 사람이 자고 있는 모습을 그리면 되었지만, '믿는다'라는 표현은 이런 형태의 문자로는 나타내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후에 그들은 쐐기 모양의 표식으로 설형문자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많은 전설과 영웅들의 일화 등을 영원히 기록하기 위해 점토판 위에 갈대 줄기로 설형문자를 적고 불에 구워 보존하였습니다.
후에 페니키아인들이 이 설형문자를 간단히 하여 알파벳을 만들었는데 이 페니키아 문자가 바로 오늘날 알파벳의 시조입니다.
한편, 수메르인은 점토를 빚어 구워서 햇볕에 말린 벽돌로 집을 지어 살았습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석재가 몹시 귀했기 때문에 수메르인은 이러한 건축방법을 택했으며, 그 벽돌로 배수와 관개를 위한 대수로를 건설하였습니다.
그들은 비교적 짧은 기간 내에 인구 1만 명 정도 규모의 도시국가들을 여러 개 건설했는데, 그 도시국가들은 각각 독립되어 있었으며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벽과 해자를 만들었습니다.
주민들의 구성을 보면 주로 도시 주변의 토지를 경작하던 농민이 대부분이었지만, 목수, 도자기공, 대장장이 등과 같은 장인들도 있었습니다.
도시를 다스리는 사람들은 승려인 사제계급이었다. 화폐는 아직 없었기 때문에 농민과 장인 간에는 서로 물물교환이 이루어졌습니다.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수메르의 각 도시들은 그 규모가 커지고 주민의 숫자도 늘어갔습니다. 그들은 도시를 중심으로 하여 문화를 가꾸어 나갔으며 여러 가지 기술도 발전시켰습니다.
바퀴를 만들어 운송수단의 혁신을 가져왔으며, 기원전 3000년대 중반에는 야생 당나귀가 끄는 바퀴 달린 전차를 전쟁에 사용하였습니다.
또한, 기원전 3000년대 초반에 와서는 구리와 주석을 합금하여 청동을 만들어 사용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기원전 2800년경까지만 해도 수메르의 도시국가들에 있어서 그 시민들 사이의 경제적 역할의 차이는 다양하였지만 계급의 구분이 확실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도시의 지도자는 시민들의 모임에서 선출되었으며, 귀족이나 왕 등 특권을 가지는 부류는 거의 없었습니다. 사제들이 국가 행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긴 했지만, 그들은 아직 특별한 계급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노예제는 일찍부터 발달하였습니다. 수메르인들은 전쟁포로들을 죽이기보다는 살려서 그 노동력을 활용하였습니다.
메소포타미아의 예측할 수 없는 기후는 수메르인을 자연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 속으로 몰아놓곤 했습니다. 이러한 공포심으로 인해 자연에 대한 숭배사상이 유행하고 종교를 중요시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각 도시국가들은 자신들이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믿었으며, 초기의 시민 집회는 신들의 모임을 모방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종교관은 도시국가의 규모가 커지고 정부형태가 복잡해짐에 따라 평등하던 시민공동체를 무너뜨렸으며, 특정한 지배계급으로 등장한 사제들의 지배권을 합리화시켜 주었습니다.
도시국가의 모든 토지는 신의 소유이고 사제는 신과 인간 사이의 중계자이므로, 사제들이 모든 토지를 관리할 책임을 지는 것은 대부분이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리하여 수메르인의 도시국가들에서는 농경, 교역 그리고 전쟁 등에 관한 중요한 결정들을 내리는 데 종교지도자들의 발언권이 강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홍수로 인해 범람이 자주 일어나고 가뭄도 심한 지역이었던 까닭에 물을 다스리는 사업이 당시의 생업에는 실로 중대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효율적인 관개사업을 위해 강력한 통치력이 요구되었고, 수메르 사회는 시민자치제에서 한 사람의 통치로 변해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도시국가들의 규모가 점차 커지면서 서로의 이해가 대립되는 상황이 많아졌으며 그로 인해 전쟁이 빈발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은 강력한 지도력을 필요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수메르인은 비상시마다 집회를 열어 일시적으로 최고통수권을 갖는 왕을 선출하였으나, 전쟁의 위협이 계속되자 왕의 권한도 계속 유지되었습니다.
따라서, 수메르의 주요 도시국가들에서는 기원전 2700년경에 이르러 세습적인 왕권이 나타나게 되었으며, 그 기원도 역시 신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도시는 신의 소유이므로 신이 자신의 소유를 다스리기 위해 대리자를 선임하는 것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시국가들에서는 사제와 왕 사이를 구분하는 것이 참으로 애매하였습니다. 지상의 통치를 위한 신의 대리자로서 왕은 도시국가 내에서 중요한 종교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종교적인 일이나 국내 정치에 있어서는 사제의 발언권이 더 강하였고, 왕은 주로 전쟁과 같은 세속적인 문제를 다루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사제와의 관계는 순탄하게 이루어졌습니다.
한편, 수메르의 도시국가들에서는 물품의 교역이 상당히 발달했습니다. 그들은 동부의 산맥 지대나 이집트로부터 석재, 금속 및 기타 광물들을 사들이고, 곡식이나 완제품을 팔았습니다.
이러한 교역의 발달로 인해 상인층이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시대에 이르러서는 세공술이 고도로 발달하였습니다. 우르(Ur)의 왕묘에서 나온 갖가지 예술품들을 보면 오늘날의 것과 비교해도 큰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수메르의 도시국가들 중에는 화려한 번영을 누려 남부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광범위하게 정복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예로 움마라는 도시는 루갈작게시(Lugalzaggesi) 왕 때 지중해 연안에까지 이르는 세력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결국 수메르인의 국가는 북방에서 내려온 아카드의 침입에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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