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리아 지방 남부 론 강 계곡에는 5세기 중엽 부르군드족이 이주하였으나 갈리아 지방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된 것은 프랑크족이었습니다.
그들은 민족 이동이 끝나갈 무렵인 5세기말에, 프랑크 왕국의 건설자이며 메로빙거 왕조를 창건한 클로비스의 주도하에 라인 강 하류 지역으로부터 팽창하여 갈리아를 포함한 주변 지역으로 그 세력을 확대시켰습니다.
클로비스는 10여 개의 부족을 합쳐 통일국가를 형성한 뒤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로마 교회와 갈리아의 로마 귀족들의 지원을 받아 이단인 아리우스파의 서고트족을 에스파냐로 몰아내고 오늘날의 벨기에와 프랑스에 해당하는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였습니다.
클로비스가 가톨릭을 믿었다고는 하나 그의 일생은 모략과 살육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음모와 배신 행위를 통해 경쟁자를 제거하였으며 부족을 통합함으로써 자신의 세력을 키워 나갔습니다.
대부분의 게르만 왕국들이 오래가지 못하고 멸망했던 데 비해 프랑크 왕국은 유럽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발전해 계속하여 새로운 시대의 주도적인 세력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를 들자면 우선 자신들의 원주지를 버리지 않고 세력을 넓혀갔으므로 그 기반이 튼튼하였고, 또한 가톨릭으로 개종함으로써 로마인이나 교회와 큰 마찰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지리적 위치로 인해 비잔틴 제국이나 이슬람 세력의 직접적인 공격을 받지 않았다는 점 등을 꼽을 수가 있습니다.
클로비스가 죽자 프랑크족의 관습대로 그의 네 명의 아들들이 왕국을 분할 통치하였습니다. 그러나 558년에 막내아들 클로타르 1세가 다시 왕국을 통합하였습니다.
이 클로타르 1세는 여자를 몹시도 탐하는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세 형수를 차례로 데리고 살았으며 한 처녀를 첩으로 삼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그 여자가 자기 동생의 남편감을 구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네 동생을 이 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영웅에게 시집보내 주겠다."
그리고는 처제마저 자신의 첩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클로타르 1세가 죽고 다시 나라는 그의 세 아들에 의해 분할통치되었습니다. 이런 분할상태에서도 형제간에 싸움이 벌어졌는데 그 발단은 여자에 대한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둘째인 힐페리히는 문학에 취미를 가지고 있었으며 신앙면에서도 독특한 신학적 이론을 주장하였지만, 여자에 대한 욕심이 대단했습니다.
힐페리히는 첫 부인과 이혼하고 미인으로 소문난 서고트 왕의 딸을 왕비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새 왕비와 결혼하기 전부터 힐페리히가 정을 통해 왔던 한 시녀가 모략을 꾸며 새 왕비를 죽이고 자신이 왕비가 되었습니다.
살해된 왕비의 언니인 브룬힐데는 당시에 힐페리히의 형 지기베르트의 왕비였습니다. 동생의 억울한 죽음을 안 브룬힐데는 복수를 결심하고 남편인 지기베르트를 부추겨 형제 사이에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결국 처참한 싸움 끝에 형제인 지기베르트와 힐페리히는 둘 다 죽고 말았습니다.
그 후 실권을 잡은 브룬힐데는 아들과 손자의 보호자로서 행세하며 멋대로 열 명의 왕을 세웠다가 죽이는 횡포를 부렸습니다.
이에 격분하여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은 그녀를 붙잡아 발가벗겨 거리를 한 바퀴 돌게 한 후 머리카락과 팔다리를 말꼬리에 매어 갈기갈기 찢어 죽였습니다.
이후에도 계속해서 피비린내 나는 음모와 내분이 그치지 않아, 7세기말에 이르러서는 왕은 유명무실해졌고, 프랑크 왕국의 실권은 지방 귀족들의 지지를 받는 궁재(宮宰)의 손으로 넘어갔습니다.
에스파냐를 점령한 이슬람이 732년에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크 왕국에 침입해 왔을 때, 투르 근처에서 이를 격퇴한 사람은 궁재 카를 마르텔이었습니다.
그는 기병 위주의 이슬람 군대를 맞아 투르와 푸아티에 사이의 평원에 매복해 있다가 적을 깊숙이 끌어들인 다음 공격하였습니다.
먼저 말을 쓰러뜨려 적의 기동력을 마비시킨 뒤 보병으로 승부를 벌였습니다. 이렇게 꼬박 하루동안 계속된 싸움 끝에 이슬람 세력은 패해 후퇴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이슬람의 침입이라는 국가 존망의 위기를 왕이 아닌 카를 마르텔(Karl Martell)이라는 궁재의 힘으로 극복한 뒤부터 궁재의 위세는 더욱 커졌습니다.
카를 마르텔은 이름만 궁재였을 뿐이지 실제로는 왕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프랑크 왕국의 백성들은 그에게 간청했습니다.
"카를 마르텔! 당신께서 우리들의 왕이 되어 주소서."
"천만에! 나는 그저 왕의 궁재일 뿐이오."
그는 국방을 중시하고 기병부대의 양성에 온 정력을 기울였습니다. 서유럽 세계에 기사들의 시대가 도래한 근원은 바로 이 카를 마르텔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죽자 아들 피핀(Pippin)이 대를 이어 프랑크 왕국의 궁재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피핀도 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무능한 왕을 규탄하는 백성들의 청을 물리치고 궁재로서 만족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나 국왕의 무능한 처사가 계속되자 그는 마침내 국왕을 수도원에 집어넣어 승려로 만든 뒤, 스스로 프랑크 왕국의 왕이 되어 751년 카롤링거 왕조를 열었습니다.
피핀은 국토를 통합하고, 국제관계에도 개입하였습니다. 당시 이탈리아는 6세기 중엽에 동고트 왕국이 무너지고 난 후 동로마 제국, 롬바르드 왕국 그리고 교황과의 싸움판이 되어 있었습니다.
동로마 제국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정복으로 시칠리아, 이탈리아 반도 남단 및 북쪽의 라벤나 주변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교황청과 로마도 일종의 보호령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한편 롬바르드 왕국은 이탈리아의 북쪽을 확보하여 그 지배력을 강화해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틈새에서 프랑크 왕국은 이탈리아 지배권 쟁탈전에 개입하여 롬바르드 왕국을 물리치고 교황의 영토적 독립을 뒷받침하게 되었습니다.
8세기 초에 롬바르드 왕국은 남쪽으로 그 세력을 뻗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이에 놀란 교황 스테파누스 2세가 753년 프랑크 국왕 피핀을 방문하였습니다.
교황이 피핀의 왕위 찬탈을 정당한 행위로 인정해 주는 대신에 피핀은 교황을 롬바르드 왕국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해 줄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 후 피핀은 두 차례에 걸쳐 롬바르드를 격파하고, 라벤나 주변 지역을 '피핀의 기증지'로써 교황에게 선사하였습니다.
이 지역은 로마 주변의 영토와 함께 교황이 군주로서 직접 지배하는 영토가 되어, 19세기까지도 '교황령 국가'로 불려졌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수장인 교황이 프랑크 국왕과 제휴를 꾀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날로 더해가는 롬바르드의 압박이었습니다.
만약 프랑크 왕국이 교황을 자신을 보호해 준다면 동로마 제국과 손을 끊고 프랑크 왕을 로마 교회의 수호자로 삼겠다는 제의였습니다. 거기에는 또한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의 교황은 동로마 황제의 간섭과 보호를 받고 있었습니다. 교황은 황제를 그 옹호자로 하여 로마 제국의 영적 지도자로서 맡은 바 사명을 다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의 동로마 황제는 명색뿐이지만 유일한 로마 제국의 황제로서 군림하고 있었으니, 서유럽의 강자인 프랑크와의 제휴를 결정하는 데에는 중대한 계기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동로마 황제 레오 3세의 우상파괴령(726년)이었습니다. 이것은 본래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우상 숭배를 금하는 종교인 데다가, 특히 우상 숭배를 철저히 배격하는 이슬람 세력이 우상을 반대하고 나서는 바람에 반포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로마 교회는 성상(聖像)이 게르만족에 대한 포교의 좋은 방편이라는 사정 등을 내세워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이러한 대립 끝에 동로마 제국이 급기야는 그때까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롬바르드와 손잡고 교황을 압박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교황 그레고리 3세가 카를 마르텔에게 제휴의 손을 내밀었으나 거절당하였고, 그 아들인 피핀에 와서야 비로소 제휴가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 결과 교황은 막대한 영토를 얻고 세력도 강해졌으나, 이것으로는 아직 불충분했습니다. 교황이 동로마 제국의 황제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국왕이 아닌 황제와 제휴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럽에 다른 황제가 없었다. 없으면 만들어내기라도 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피핀의 뒤를 이은 카를(Charlemagne) 대제(771~814년)가 800년에 교황으로부터 서로마 제국의 황제관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카를 대제는 서로마 제국을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자신의 세력기반을 확고하게 다지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이제 게르만족의 대이동 이후 혼란과 무질서를 거듭했던 상황을 매듭짓고 유럽에 새로운 질서를 가져다주는 획기적인 것이었습니다.
바야흐로 황제와 교황이 협력하면서 그리스 정교의 동로마 제국과는 그 성격이 다른 문화를 일구어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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