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말기에 일어난 또 하나의 재난은 백년전쟁이었습니다.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벌어진 이 전쟁은 1339년에 시작되어 1453년에 끝났다 하여 백년전쟁이라 부르지만, 전쟁은 산발적으로 이루어져 실제로 싸운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백년전쟁의 주된 원인의 하나는 프랑스에서의 발루아 왕조의 성립과 이에 관련된 왕위계승권 문제였습니다.
카페 왕조의 마지막 왕인 샤를 4세가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자 프랑스에서는 많은 논의 끝에 샤를 4세의 사촌 형제인 발루아 백작을 필립 6세로 추대하여 왕위를 잇게 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안 영국의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의 어머니인 이사벨라가 프랑스 왕이던 샤를 4세의 딸이므로 혈연으로 따지면 필립 6세보다 자신이 더 가깝다며 프랑스 왕위 상속권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전부터 영국은 프랑스에 영국 소유의 땅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역대 프랑스 왕들은 이를 회복하려고 노력하였던 관계로 양국 사이는 언제나 전쟁과 대립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중 가스코뉴 지방의 영토문제는 계속해서 분쟁의 씨앗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제껏 영국의 국왕이 프랑스 영토 내에 있는 영국 영토로 인해 영주의 자격으로 프랑스 국왕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는 것은 봉건적 관습으로 볼 때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프랑스 국왕 자리를 노리는 에드워드 3세는 이를 발판으로 프랑스를 영국에 병합시키려는 야심을 갖게 된 것입니다.
또 다른 분쟁의 씨앗은 지금의 벨기에에 해당되는 플랑드르 지방의 문제였습니다. 플랑드르에서는 14세기 초 이래 부유한 상인 지배에 대해 수공업자와 임금노동자가 폭동과 반란을 여러 차례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플랑드르의 영주가 이를 적절히 해결하지 못하자 프랑스의 왕이 개입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플랑드르는 영국 양모(羊毛)의 주요 시장이었으므로 양모 수출에 대한 관세가 주요 수입원이었던 영국으로서는 플랑드르가 프랑스의 지배하에 놓이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배경과 함께 백년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은 필립 6세의 측근 법률가들이 에드워드 3세의 1329년의 충성서약이 형식적으로 미비해서 고치라고 요구한 것을 에드워드가 거부하면서 비롯되었습니다.
당시 에드워드는 스코틀랜드와 전쟁 중에 있었는데, 프랑스가 스코틀랜드를 은근히 지원하는 것을 몹시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던 터여서 양국의 관계가 험악해지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필립 6세는 에드워드 3세가 서약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스코뉴를 몰수했습니다. 그러자 에드워드 3세도 프랑스 왕위를 요구하며 선전포고하였습니다.
백년전쟁이 시작될 무렵의 프랑스와 영국의 객관적 전력은 프랑스가 훨씬 유리하였습니다. 당시 영국의 인구는 약 350만 인 데 비해 프랑스는 약 1천600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생활수준도 프랑스가 높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전체적인 자원의 차이가 중세 사회의 군사력과는 별로 관계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영국이나 프랑스가 실제로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은 비슷했습니다. 프랑스군의 주력은 여전히 중무장을 한 봉건 귀족의 기사들이었고, 영국군은 봉건적 군대와 함께 신무기인 커다란 활을 가진 보병대가 참가하고 있었습니다.
전쟁기간을 통하여 위력을 발휘한 신무기는 긴 활을 이용한 강력한 화살과 커다란 굉음을 내며 터지는 대포였습니다.
이에 기사들은 과거의 방패나 갑옷으로는 견딜 수 없었으므로 대비책으로 갑옷에 철판을 덧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5세기 갑옷의 무게는 보통 60~80킬로그램 정도였다고 하니 이 기사들이 재빠른 기동력을 발휘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전쟁이 시작될 무렵에 에드워드 3세가 필립 6세에게 기사도 정신을 발휘하여 병사들의 희생을 막으려고 다음과 같은 3가지 방법으로 결투를 신청한 일이었습니다.
첫째로 국왕끼리 대결하여 결판을 내든지 각 대표를 몇 사람 뽑아 국왕 대신에 결투를 벌이자.
둘째는 굶주린 사자와 결투하여 살아남는 자가 승리하는 걸로 하자.
셋째로는 환자를 상대로 빨리 병을 고치는 사람이 승리하는 것으로 하자.
나라의 운명을 건 결투치고는 유치한 감이 있지만, 이 제의는 필립 6세가 응하지 않아 빛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1339년, 전쟁은 두 나라 사이의 바다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영국 함대가 플랑드르에 정박 중인 프랑스 함대에 발포하자 양쪽의 포화가 저녁까지 불을 뿜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프랑스 함대는 거의 전멸하다시피 하였습니다. 2만 5천 명에 달하는 병사가 전사하였거나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반면, 영국의 전사자는 4명에 불과하였습니다. 대승리를 거둔 에드워드 3세는 큰소리를 쳤습니다.
"금년은 내가 영국을 통치한 지 14년이 되는 해인 동시에 프랑스 통치의 첫해가 되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패전의 소식이 파리에 도달하자 프랑스의 충격은 매우 컸습니다. 왕에게 솔직히 패전 소식을 알릴 수 없던 한 측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폐하, 영국군은 정말 겁쟁이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용감한 프랑스 병사들은 해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용감히 바다에 뛰어들었으나 영국군은 한 사람도 뛰어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백년전쟁을 통하여 줄곧 싸움터가 된 것은 프랑스였으나 휴전기간이 많아 실제의 전투는 간헐적으로 행해졌습니다.
그 후 1346년 에드워드 3세가 노르망디에 상륙하여 파리로 진격함으로써 전쟁은 다시 전개되었습니다. 그것은 페스트가 유럽 대륙에 상륙하기 바로 직전의 일이었습니다.
복수의 칼을 갈던 필립 6세도 직접 출전하여 양군은 크레시에서 정면 충돌하였습니다. 서로가 필사적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은 카를 대제 이래로 자랑인 기마대를 내세워 무서운 기세로 공격했습니다.
영국군에서도 프랑스 기병을 쳐부술 전법을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농민으로 구성된 보병에게 각각 커다란 활을 주어 적의 기마병이 나타나기만 하면 일제히 화살을 퍼부어 우선 말부터 쓰러뜨린다는 전법이었습니다.
이 전술은 보기 좋게 들어맞았습니다. 말에서 떨어진 기사들은 무거운 갑옷 때문에 허둥지둥거릴 뿐이어서 화살의 좋은 표적이 되었습니다. 결국 여기에서도 프랑스군은 대패하여 많은 기사들만을 잃었습니다.
영국군은 이 여세를 몰아 이듬해에 칼레를 함락시켜 프랑스 침공의 견고한 근거지로 삼았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1356년의 푸아티에 싸움이 있기까지 휴전상태에 들어갔습니다.
이 기간에는 흑사병이 유행하여 전쟁의 혼란에 허덕이고 있는 농민들을 더욱 힘들게 하였습니다. 전쟁비용을 충당해야 하는 과중한 세금, 방화와 약탈 거기에다 흑사병까지 겹치자 영국과 프랑스 양국은 똑같이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로빈 후드' 이야기는 이 시대의 어려움을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재밌는 세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약 세계사] 프랑크 왕국의 탄생 (0) | 2023.02.22 |
---|---|
[요약 세계사] 유럽인구 30% 사망, 중세 흑사병 (0) | 2023.02.21 |
[요약 세계사] 칭기즈칸의 탄생 (0) | 2023.02.02 |
[요약 세계사] 에게 문명 (0) | 2023.01.31 |
[요약 세계사] 고대 로마 시대 (0) | 2023.01.2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