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는 페미니즘을 따르거나 주장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로, 여기서 페미니즘은 성 차별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사회구조로 인해 여성에게 주어지는 억압에 저항하여 성평등을 이룩하고자 하는 사상을 말합니다.
이는 '여성의 특질을 갖추고 있는 것'이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 '페미나(femina)'에서 파생했습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페미니즘을 '성별로 인해 발생하는 정치ㆍ경제ㆍ사회 문화적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견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페미니즘 및 페미니스트 역사
남성 중심 사회에 여성이 참여하고자 하는 시도는 로마 공화정(기원전 509~기원전 27) 시대에 최초로 있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으며, 14세기에는 프랑스 최초의 여성 문필가 크리스틴 드 피장이 처음으로 여성의 사회적 업적과 권리를 주장하는 글을 남겼습니다.
현재 알려진 페미니즘의 역사는 19세기부터 시작된 1, 2, 3차 페미니즘 물결(wave)로 구분됩니다.
1차 페미니즘 물결
1차 페미니즘 물결은 19세기부터 1950년대까지의 페미니즘을 지칭합니다. 이 시기 페미니즘은 만들어진 사회구조 안에서 여성이 개인으로서의 가능성을 발휘하는 것에 중점을 둔 '자유주의 페미니즘'이 대세를 이뤘습니다.
페미니즘 최초의 물결은 프랑스혁명의 이상과 여성 참여에 의해 영감을 받아 시작됐으며, 영국에서는 여성 해방 사상의 선구자로 꼽히는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 1759~1797)가 1792년 펴낸 ≪여성의 권리 옹호≫가 이러한 최초의 물결을 선도했습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이 평등한 교육을 받을 권리에 관심을 가지며 여성이 태생적으로 남성에 비해 열등한 것이 아닌 교육의 부재로 열등하게 보이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사상에 영향을 받은 19세기 페미니스트들은 평등한 교육을 받을 권리를 위해 투쟁했고, 결과적으로 여성을 위한 학교와 대학을 개설하고 남성의 대학과 직업에 진출할 자격을 획득했습니다.
또한 이 시기의 페미니스트들은 기존에 남성만 누리고 있던 참정권과 사유재산권을 획득하는 것이 남녀평등 실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여성참정권 운동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그 결과로 1893년 뉴질랜드가 세계 최초로 여성 참정권을 인정한 데 이어 호주는 1902년, 핀란드는 1906년, 미국은 1920년, 영국은 1928년(30세 이상 여성은 1918년), 프랑스는 1946년에 여성 투표권이 주어졌다. 한국은 1948년 제정된 헌법에서 여성참정권을 부여했습니다.
아울러 이 시기의 또 다른 페미니스트로는 존 스튜어트 밀, 버지니아 울프 등이 있습니다.
19세기 영국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1869년 저작 《여성의 예속》에서 인류의 발전을 위해 두 성의 완전한 평등을 기본 원리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20세기 영국 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1929)에서 여성 소설가와 사상가들이 겪는 법적, 경제적 불평등을 지적했습니다.
2차 페미니즘 물결
페미니즘의 두 번째 물결은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페미니즘을 지칭하는데, 이 시기는 노동환경과 임금 수준 개선 등 사회적 불평등 현상에서 여성이 해방될 것을 강조했습니다.
이 시기에는 정치적 집단으로서의 여성을 내세워 사회제도의 개선을 요구하는 급진적인 성격의 래디컬(급진적) 페미니즘이 발전했습니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는 1949년 쓴 《제2의 성》으로 2차 물결의 기반을 제공했습니다.
이 책은 가부장제가 역사적으로 재생산되며 사회적 규범으로 자리 잡은 방식과 그 과정 속에서 여성을 고정관념화하고 가부장적 사회 조직을 위한 수단으로 '사회적 타자'로 만들어 소외시켰다고 주장했습니다.
보부아르는 이 책을 통해 생물학적 '성'과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젠더'를 구분해 한 개인을 여성으로 타자화하는 사회 체제를 개념화했습니다.
한편, 20세기 미국의 작가이자 사회운동가인 베티 프리단의 1963년 작 《여성성의 신화》 역시 2차 물결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프리단은 이 책에서 1950~60년대 중상류층 전업주부들이 물질적인 안락함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불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연구해 게재했습니다.
행복을 위해 가부장적인 의식에 따랐음에도 삶에서 만족감을 찾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3차 페미니즘 물결
페미니즘의 3차 물결은 1990년대부터 시작된 페미니즘을 지칭합니다. 이는 종전까지의 페미니즘 물결이 대부분 중산계층 백인 시스젠더 여성으로만 구성되어 문화적 다양성을 등한시했다는 문제점을 극복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3차 물결은 여성의 인종, 국적, 계층, 종교, 성적 지향성, 문화적 다양성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 시기 대표적 페미니스트인 주디스 버틀러는 《젠더 트러블: 페미니즘과 정체성의 전복》(1990)에서 기존 페미니즘 이론가들의 섹스/젠더 이분법을 비판하며 여러 갈래의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한국의 페미니즘 및 페미니스트 역사
한국에서 페미니즘 운동은 개화기 신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여성단체를 조직한 것에서 시작합니다. 개화기 여성운동은 여성의 교육권 보장과 남녀의 교육 기회균등을 중심으로 국채보상운동을 진행했습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며 1920년대 한국의 페미니즘은 자유주의, 사회주의, 기독교 페미니즘 등 다양한 갈래로 나뉘었습니다.
조선 최초의 본격적인 여성운동 조직은 1927년 탄생한 '근우회'로 꼽힙니다.
근우회는 근우 선언문에서 “조선에 있어서는 여성의 지위가 한층 저열하다. (중략) 우리의 앞길이 여하히 험악할지라도 우리는 일천만 자매의 힘으로 우리의 역사적 임무를 수행하려 한다. 여성은 벌써 약자가 아니다. 여성은 스스로 해방하는 날 세계가 해방될 것이다. 조선 자매들아 단결하라!”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1928년 중반 이후 운동 노선상 갈등으로 기독교 여성들은 근우회를 탈퇴하고 독자적 노선으로 들어섰습니다. 한편, 이 시기 여권운동을 선도한 대표적인 페미니스트는 나혜석(1896~1948) 등이 있습니다.
이후 여성운동이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초반으로, 한국의 선구적인 여성운동 단체로 꼽히는 '한국 여성의 전화'가 1983년 설립되어 성폭력, 가정폭력, 성매매에 대한 '반성폭력운동'을 이끌었습니다.
1987년에는 한국여성민우회가 창립됐고, 이 시기 반성폭력운동의 결과로 1994년 성폭력특별법이 제정되고 1998년 여성특별위원회가 설치됐습니다.
대통령직속 여성특별위원회는 2001년 1월 여성부로 격상됐고, 2010년에는 여성부를 개편해 여성가족부(여가부)가 발족했습니다.
2000년대 초반 페미니스트들은 호주제 폐지 성과를 이뤄냈습니다. 2000년 9월 137개 여성 및 시민사회단체는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연대'를 발족해 호주제 위헌소송을 준비했으며, 2005년 호주제 폐지를 중심으로 한 민법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습니다.
한국의 페미니스트들
여성을 남성과 동일한 이성적인 능력을 가진 존재로 상정하며 여성의 자유를 주장한 대표적인 자유주의 페미니스트에는 나혜석, 김명순, 김일엽, 박인덕 등이 있었습니다.
한편, 마르크스주의를 내세우며 여성 해방에는 계급 해방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에는 허정숙, 주세죽, 정칠성 등이 꼽히며, 기독교 계몽운동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 계열 페미니스트에는 김활란, 황신덕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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