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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전 국가주석 장쩌민 사망, 그는 누구였을까

by 스페이스토리 2022.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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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쩌민
장쩌민

장쩌민은 중국 공산당 당서기를 지낸 인물로 중국의 개혁개방을 주도했던 등샤오핑에 의해 후계자로 인정받았으며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중국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지낸 인물입니다.

 

 

 

장쩌민 출생과 학창시절

장쩌민은 1926년 중국 장쑤성[江蘇省] 양저우[揚州]에서 출생했습니다. 양저우에서 6년과정의 중등학교를 졸업하였는데 당시 중일전쟁과 난징대학살 등으로 인해 어려운 시기를 보냈습니다.

 

특히 숙부인 장상칭(江上靑)의 공산당 활동에 영향을 받았으며 숙부가 총격을 받아 사망하자 그의 양자로 입적되었습니다. 이런 배경으로 인해 장쩌민은 국가에 대한 애국심이 고취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대학은 고향을 떠나 난징에 있는 난징중앙대학교에 입학하였다가 중일전쟁이 끝나고 모교가 상하이교통[上海交通]대학으로 통합되자, 1947년 전기학과를 졸업하였습니다.

 

상하이교통대학 재학시절인 1946년 공산당에 입당하였으며, 국민당의 교육정책에 반대하여 학생시위에 참가하였습니다. 이후에는 국민당의 부패한 실상을 비판하며 정치적인 활동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산업체 관리자로 활동

장쩌민이 대학을 졸업하자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은 더욱 치열해졌습니다.

 

1949년 10월 국공내전에서 승리한공산당이 정국을 장악하였고 장쩌민은 상하이에 있는 식품공장의 총책임자로 일했으며 이후 1953년 창춘[長春]에 자동차공장을 신설하는데 엔지니어로 참가했으며, 1955년 소련 모스크바에 있는 스탈린자동차공장에서 1년간 연수했습니다.

 

1956년 귀국 후 1962년까지 창춘자동차공장에서 트럭을 제조하는 책임자로 일했으며 당시 대약진운동과 우파를 척결하는 정치적 혼란기를 버텨냈습니다.

 

이후 상하이 전기장비연구소 소장으로 근무하다가 우한[武漢]에 건설된 화력발전기계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했습니다. 장쩌민은 발전기계 분야에서 경험과 실력있는 관리자로 인정받았습니다.

 

 

 

장쩌민, 문화대혁명으로 숙청되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장쩌민은 홍위병들에게 자본주의를 추구한다는 죄목으로 비판의 대상으로 내몰렸고 당과 공직에서 추방되었습니다.

 

모든 활동이 중지되고 핵심당원학교 농장에 배속되어 가축을 돌보고, 농사일을 배우는 육체노동을 해야만 했습니다.

 

 

 

산업체 관리자에서 정계로 복귀

1970년 제1기계공업부 외사국장으로 임명되어 베이징으로 복귀하면서 이때부터 중국 공산당 정계에서 업무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1973년 루마니아에 건설되는 공장을 지원하기 위해 책임자로 파견됐습니다. 1976년 1월 저우언라이가 사망하고 그해 9월 마오쩌둥이 사망하면서 중국은 새로운 정치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장쩌민은 상하이를 근거지로 저항하던 마오쩌둥과 4인방의 추종세력을 숙청하고 당에 충성하는 사람들로 교체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화궈펑이 실각하고 덩샤오핑이 국가 주석이 되자 그의 정책에 적극 동조했습니다.

 

1980년 국가수출입관리위원회 부주임·외국투자관리위원회 부주임을 거쳐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위원이 됐습니다.

 

1983년 국무원 전자공업부장(장관급)에 오르고, 1984년 국무원 전자공업진흥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습니다.

 

 

 

장쩌민, 상하이 시장으로 선출

장쩌민은 1985년 상하이 시(市) 시장으로 임명되어, 상하이를 현대적인 도시로 변모시키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푸 강 동쪽인 푸동지구를 개발하여 상하이의 중심 도시지역으로 개발했습니다. 외국자본을 유치하여 도시 인프라를 확충했으며 상하이를 세계적인 도시로 성장시켰습니다.

 

1987년에는 상하이 시 당서기장 직도 맡아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면서 중국 공산당 내 비중있는 인물로 떠올랐습니다.

 

또한 상하이에서 일어난 민주화 요구 시위에서 학생들과 직접 대화하며 설득하면서 정치적인 인지도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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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총서기, 국가 주석에 임명

1989년 6월 당 총서기 자오쯔양[趙紫陽]이 톈안먼[天安門] 광장에서 일어난 민주화 시위에 동조하였다는 이유로 실각하자, 같은 달에 개최된 제13기 4차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등샤오핑[鄧小平]의 후원을 받아 당 총서기에 선출됐습니다.

 

이어 1990년 4월 중국의 최고실권자 덩샤오핑의 마지막 공직이었던 국가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선출됨으로써 당과 정부의 전권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장쩌민의 외교정책과 성과

최고지도자로서 첫 외국 방문국으로 북한을 방문했으며 김일성을 만났으며 대한민국 양국 간의 우호와 경제교류에 관한 이해를 구했으며 1992년 8월 24일 중국과 대한민국은 상호 무역대표부를 설치하고 수교를 했습니다.

 

1994년에는 대한민국 김영삼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여 장쩌민과 정상회담을 가졌으며 1995년에는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1999년 러시아 대통령 보리스 옐친과 중국과 러시아 국경에 관한 의정서를 교환하고 오랜 동안 양국의 국경문제를 해결하였으며 주변국들과 우호적인 정책을 취했습니다.

 

또한, 1997년 미국을 방문하여 클린턴 대통령과 양국의 현안문제를 협의하였으며 2002년에도 미국을 방문하여 부시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이런 개방적 정책에 힘입어 중국의 경제는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는데 그의 집권기간 동안 GDP는 1조 6900억 위안(1989년)에서 9조 5900억 위안(2001년)으로 성장하였으며, 외환보유고는 55.5억 달러에서 2,500억 달러로 증가했습니다. 중국은 장쩌민의 집권동안 연평균 약 9.4%의 성장을 했습니다.

 

 

 

후진타오에게 정권 이양

2002년 당 총서기, 2003년 국가 주석 자리를 후진타오에게 물려주어 정권교체를 이루었지만 2004년 당 중앙군사위 주석, 2005년 5월까지 국가 중앙군사위 주석 자리를 유지하여 완전히 정계은퇴를 하지 않고 막후 실력자로 역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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