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본관은 순흥이며,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가슴과 배에 7개의 점이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에 응하여 태어났다는 뜻으로 아명(兒名)을 응칠(應七)이라 지었으며, 자라서는 자(字)로 사용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진사를 지낸 안태훈이며 할아버지는 안인수로 진해현감을 지냈습니다. 할아버지가 미곡상을 하여 집안은 부유하였습니다.
안중근은 어려서부터 한학(漢學)을 배웠으나 성장하면서 무술에 더 열중하였습니다.
청년기
말타기와 사냥에 능했으며 포수들 사이에서도 명사수로 알려졌습니다.
동학운동이 일어나자 아버지 안태훈이 사병을 조직하여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데 가담하였으며, 1895년 아버지를 따라 가톨릭교에 입교하여 신식 학문을 접하고 가톨릭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웠으며, 도마[Thomas, 多默]라는 세례명을 얻었습니다.
의병활동
1904년 홀로 평양에 나와 석탄상을 경영하고 이듬해 을사늑약이 체결되는 것을 보자 상점을 팔아 1906년 그 돈으로 삼흥학교(후에 오학교로 개칭)를 세우고, 이어 남포의 돈의학교를 인수하여 인재양성에 힘썼습니다.
그러나 국운이 극도로 기울자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나라를 바로세울 수 없다고 판단하여, 1907년 연해주로 가서 의병운동에 참가하였습니다.
이듬해 전제덕의 휘하에서 대한의군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 및 아령지구 사령관의 자격으로 엄인섭과 함께 1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침투, 일군과 격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퇴하였습니다.
이후 노에프스키에서 망명투사들이 발간하는 《대동공보》의 탐방원으로 활약하는 한편 동료들에게 충군애국 사상을 고취하는 데 진력하였습니다.
동의단지회
1909년 동지 11명과 죽음으로써 구국투쟁을 벌일 것을 손가락을 끊어 맹세하고 동의단지회를 결성하였습니다.
그해 10월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상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하여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처단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동지 우덕순과 함께 거사하기로 뜻을 같이하고 동지 조도선과 통역 유동하와 함께 이강의 후원을 받아 행동에 나섰습니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
1909년 10월 26일 일본인으로 가장, 하얼빈 역에 잠입하여 역 플랫폼에서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는 이토를 사살하고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타이지로, 만철 이사 다나카 세이타로 등에게 중상을 입히고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순국
일본 관헌에게 넘겨져 중국 뤼순에 위치한 뤼순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이듬해 2월 14일,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으며, 3월 26일 형이 집행되었습니다.
옥중에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하였으며, 서예에도 뛰어나 옥중에서 휘호 한 많은 유묵이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고, 1970년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5가 471번지에 기념관이 건립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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