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말, 지방 호족들이 성장하면서 우리나라는 다시 견훤이 세운 후백제, 궁예가 세운 후고구려, 신라로 분열되는 후삼국 시대가 되었습니다.
고려를 세운 왕건은 원래 궁예의 부하였는데, 궁예가 쫓겨난 후 국왕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왕건은 수도를 철원에서 개경(지금의 개성)으로 옮기고, 나라 이름도 고려로 고쳤습니다.
이후 신라와 후백제에게 차례로 항복을 받아내 후삼국을 통일하였습니다.
이렇게 고려는 후고구려, 후백제, 신라는 물론 멸망한 발해까지 받아들여 실질적인 민족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고려의 북진 정책과 친송 정책이 거란의 침입을 부르다
고려는 4대 임금인 광종 때 중국을 통일한 송나라와 정식으로 국교를 맺으면서 송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한편 고려는 나라 이름을 고려로 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고구려를 잇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해 북쪽으로 영토를 넓히는 북진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습니다.
이러한 고려의 친송 정책과 북진 정책은 거란을 자극했습니다.
압록강 유역에 살고 있던 거란은 고려가 송과 군사 동맹을 맺어 자신들을 공격할까 봐 초조했습니다.
그래서 송보다 먼저 고려와 외교를 맺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고려는 거란을 싫어했습니다.
특히 태조 왕건은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나라라고 생각해서 무척 경계했습니다.
942년 거란이 고려와 친해지기 위해 낙타 50마리를 사신과 함께 보낸 적이 있었는데, 태조는 그 낙타들을 다리 밑에 묶어 굶겨 죽여 버리기까지 했습니다.
서희의 담판으로 강동 6주를 손에 넣다
993년, 성종 때 거란의 장수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했습니다.
대신들은 거란군의 기세에 눌려 서경 이북의 땅을 거란에게 넘겨주자고 했습니다.
이때 고려의 외교가였던 서희가 나섰습니다.
그는 스스로 적진으로 들어가 거란의 장군 소손녕과 담판을 지었습니다.
서희는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강조하고, 여진 때문에 거란과 외교를 못하고 있으니, 여진만 물리치면 거란과 외교 관계를 맺겠다고 설득했습니다.
여진은 당시 압록강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민족입니다.
소손녕은 서희의 말을 들어 군대를 철수시켰습니다.
이에 고려는 여진을 몰아내고 압록강 동쪽의 땅 280리를 개척하여 강동 6주를 세웠습니다.
2차 침입의 위기를 넘기다
1009년, 고려에서는 '강조의 정변'이 일어났습니다.
이 일은 당시 서북면(지금의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지방)을 지키던 강조가 고려 왕이었던 목종을 내몰고 현종을 즉위시킨 사건입니다.
1010년, 거란은 신하로서 임금을 친 강조를 벌하겠다는 구실로 고려에 쳐들어왔습니다.
그러나 거란의 속마음은 고려에 빼앗긴 강동 6주를 되찾고, 고려에게 친송 정책을 포기하라고 압박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거란군이 쳐들어오자 강조는 힘을 다해 맞서 싸우다가 포로가 되었습니다.
강조는 모진 고문 속에서도 거란 왕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하고, 절개를 지키다가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강조가 죽고 오래 지나지 않아 개경이 함락되었습니다.
그러자 현종은 거란에 직접 찾아가 신하의 예를 갖추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제야 거란군은 고려 땅에서 물러났습니다.
하지만 고려의 장군 양규는 거란군을 곱게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물러가는 거란 군대를 공격하여 병사 약 7,000명을 사살하고, 잡혀가는 고려 백성 1만여 명을 구해냈습니다.
귀주대첩으로 거란의 3차 침입을 격퇴하다
거란은 고려에 약속을 지킬 것을 요구하며 1018년, 10만 대군을 이끌고 3차 침입을 했습니다.
이때 고려는 강감찬 장군이 20만 8천3백 명의 군사를 일으켜 거란에 맞서 싸웠습니다.
3차 침입에서 거란군이 남하할 때 평안북도 흥화진에서 큰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강감찬은 기병 1만 2천여 명을 산골짜기에 매복(상대를 불시에 공격하려고 숨어 있는 작전)시킨 후 흥화진 앞의 삼교천을 막아 수심을 얕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거란군이 삼교천을 지날 때 둑을 터뜨렸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삼교천을 건너던 거란군은 쏟아지는 물줄기에 혼이 났고, 이어 매복한 기병들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대패했습니다.
그런데도 거란군은 포기할 줄 모르고 개경 근처까지 공격해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강감찬이 적이 먹을 식량과 물을 모두 없애는 '청야 작전'을 펼쳤습니다.
타격을 받은 거란군은 우왕좌왕했습니다.
강감찬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기습 공격하여 거란군 500여 명의 목을 베었습니다.
거란군은 서둘러 자기네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강감찬은 거란으로 돌아갈 때 꼭 거쳐야 하는 귀주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맹공격을 퍼부었습니다.
이것이 10만 명의 거란군 중 살아 돌아간 군사가 겨우 수천 명에 지나지 않았다는 '귀주대첩'입니다.
고려군의 공격으로 거란군의 시체가 들판을 덮었고, 포로와 노획한 말·낙타·갑옷은 숫자를 셀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거란과 여진을 막기 위해 천리장성을 쌓다
3차 전쟁까지 치른 고려와 거란은 조금씩 양보하여 협상을 맺었습니다.
거란은 강동 6주를 포기하고, 고려는 친송 정책을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고려는 거란과 화의를 맺은 후에도 여진 등 북방 민족들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1년에 걸쳐 압록강 입구부터 도련포에 이르는 긴 성을 쌓았습니다.
이것이 '천리장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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